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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chen

재밌는 하루를 보낼 권리

                    



요전 날엔 창밖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일하다 말고 '나도 재밌는 하루를 보낼 권리가 있다!'라고 내적 비명을 질렀다. 야심차게 노트북을 냅다 덮고는 주섬주섬 외출 준비를 하는데, 막상 나가려니 거실 탁자 위 덩그러니 놓인 노트북과 아마도 그 안에 도착해있을 고객사의 피드백이 눈에 밟히는 게 아닌가.. 기어이 노트북까지 가방에 넣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서점엘 갈까, 궁금했던 그 카페에 갈까, 도서관엘 갈까 (그래봤자 전부 반경 1km)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는 사이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멘 어깨가 뻐근해져 왔다. 결국 거의 매일 출근 도장 찍다시피 하는 집에서 5분 거리 카페에서 일하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

사실 늘 반복되는 패턴이다. 왜 나는 놀러 나가지를 못할까? 

지도에 별모양으로 꾹꾹 저장해둔 장소들은 먼 밤하늘의 별자리같다. 약속이나 미팅이 있지 않고서는 거의 집에서 혼자 일하는데다 올해는 제대로 된 휴가도 떠나지 않은터라 순수하게 '놀러' 나가본 게 전생같다. 아냐.. 전생에도 난 일하고 있었을 것만 같아

그렇게 재밌는 하루를 보내자고 외쳤으나 집 앞 카페에서 일만 하다가 돌아온 그날, 나는 오랜만에 부엌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몇 날며칠 다짐만 했던 땅콩호박 타르트 만들기를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우선 냉장고에서 버터와 달걀부터 꺼냈다.
재료들이 미지근한 실온이 되는 사이 몇 가지 할 일을 처리하고, 반죽을 휴지시키는 사이 원고를 써 내려가고, 타르트지를 굽고, 거기에 아몬드크림을 채워서 다시 한번 굽고, 땅콩호박은 4등분 해서 아주 오랫동안 구워 쫀득해진 걸 가지고 부드럽게 갈아서 퓨레를 만들고. 이렇게 만드는 사이 해가 저물고 남편은 퇴근하고 잘 시간이 다 돼서, 다음 날 아침 눈뜨자마자 땅콩호박퓨레까지 올려 마지막 오븐행.

아주 긴 공정을 거쳐 서서히 완성돼 가는 타르트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어떤 메뉴가 내 눈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의 그 충만함과 성취감은, 내가 생각했던 종류의 자극이나 즐거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하루를 꽤 근사하게 만들어 줬다. 아니, 다음 날 아침에야 완성됐으니 이틀이나 근사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어쩌면 새로운 영감은 밖에서 충전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외출해야 한다는 강박이 된 건 아닐까?

노련한 집순이는 그렇게 외출하지 않을 이유를 스스로 합리화하며 다음 홈쿠킹 메뉴를 궁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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