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을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것은 단 하나,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 것. 그 다짐을 기가 막히게 지키면서 잃은 것(=시간)도 얻은 것(=돈)도 많았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다고 믿는 편인데 지금은 일을 열심히 하는 시기라고 합리화하기로 했다. 바꾸어 말하면 남편과의 관계도, 가족들도, 건강도 대체로 안녕했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2024년도 2023년과 같기를 바란다.
올해의 구매
물건이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걸 실감했다. 소파, 오븐, 가습기를 들이고 든 생각이다. 소파를 들이니 집이 더 넓어보이고, 오븐이 생기니 요리의 폭이 넓어졌다. 겨울이면 비염으로 고생했는데 브루네 가습기 덕에 코와 목이 아주 평화롭네. 좋은 소비는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 이 명제를 새삼 실감한다. 다음 후보는 에어로치노 되겠습니다.
올해의 선수
요즘 날라다니는 할리버튼을 꼽으려다가 오클라호마씨티 썬더의 홈그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열흘 동안 굶은 벤 애플렉 같기도, 점심도 안 먹고 일만 할 것 같은 워커홀릭 같기도 한 그는 매사에 대체로 심드렁해보이는데 클러치 상황에서 포효하는걸 보면 또 승질은 있는 것 같다. 동 포지션 선배인 요키치로부터 '걔는 살좀 쪄야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별다른 응수 안하고 묵묵히 스탯으로 증명하는 것도 멋있고.. 아니 솔직히 멋있지는 않은데 그냥 계속 관심이 가는 선수다. 웸반야마 말고 이 친구가 신인상 탔으면 하는 바람.
올해의 영화
마이클 만의 영화들과 다이하드 시리즈. 삶이라는 껍데기에 알맹이라고는 일 밖에 남지 않은 현대 사회의 남성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유쾌하지 않은 잔상이지만 어쨌거나 여운이 짙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니셰린의 밴시.
올해의 시리즈
테드라소 시즌 3. 이보다 완벽한 엔딩이 있을까? 내 인생의 드라마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외교관. 단숨에 몰입해서 봤다.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 시즌 1은 흠뻑 빠져서 봤고, 시즌 2 중반부터는 의리로 봤다. 시즌 4도 의리로 기다린다.
올해의 이별
챈들러 빙.
올해의 노래
노래를 거의 듣지 않은 한 해로 기억될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샤이니의 새 앨범은 많이 들었다. 아티스트에게 '잘한다'는 수식어는 이럴 때 붙이는 게 아닐까. 본인들이 쌓아온 커리어와 레거시로 현 시점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아웃풋을 뽑아냈다고 생각한다.
올해의 책
남편과 살면서 내 삶에 생긴 변화를 이해하고자 읽기 시작한 <단순한 열망: 미니멀리즘 탐구>와 <침묵예찬>. 그래서 남편을 더 이해하게 됐냐고? 안 싸운 지 몇 달 되가는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올해의 요리책
몇 권의 요리책을 사거나 선물받고나서 든 생각. 요리책을 살 것이 아니라 정리를 해야겠다..
올해의 변화
2월의 이사.
올해의 여행
결혼 하고 함께 떠나는 첫 해외였던 호주. 자연을 사랑하는 남편과 도시를 사랑하는 나의 절충안이었고, 옳은 선택이었다.
언니와 엄마, 조카와 떠난 네 모녀 도쿄여행도 기억에 남는다. 열 번쯤 가본 도쿄였는데 이들과 함께하니 전혀 새로운 도시로 느껴졌다.
올해의 레시피
파이 크러스트와 플랫브래드 레시피. 이 반죽에 여름엔 열매 채소, 가을 뿌리 채소를, 심플하게 토마토 소스만 슥슥 발라 구워먹어도 맛있다. 남편은 내가 구운 피자와 파이를 먹고 '이건 사건이다'라고 명명했지. 내년에도 부지런히 구워먹을 예정이다. 오븐 없이 어찌 살았나 몰라.
올해의 결심 혹은 타협
다음 집은 매매를
올해의 카페
장보러 가는 길에 있는 하나길이라는 카페에 참 자주 갔었다. 아쉽게도 10월에 문을 닫으셨고, 그 이후로는 도래노트에 종종 들른다. 에티오피아 원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여기서 내려주는 에티오피아 드립은 참 맛있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해 마시고 있으면 어느샌가 얼음컵을 가져다주시는 센스가 참 감사하다. 적당한 거리감이 있고 익명성이 보장되지만 그래도 너무 이방인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카페에 자주 가게 된다. 그 두 곳이 그랬다.
올해의 파스타
점심을 주로 집에서 혼자 먹는데 일주일에 2~3번은 토마토 파스타를 해 먹었다. 파스타를 삶는 동안 마늘향을 낸 올리브오일에 센 불로 올려 토마토를 볶는다. 거의 뭉그러질정도로 익으면 냉장고에 있던 채소 꼬투리들 -없으면 그냥 토마토만- 넣어 볶다가, 면이랑 면수 넣고 잘 에멀젼에서 완성하는 한 그릇 요리. 기장멸치로 앤초비 만들어둔 것이 있어 요긴하게 썼다.
올해의 가성비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어서 한여름엔 위워크 올액세스를 등록했다. 세보지는 않았지만 주말포함 일주일에 5번 이상 출근도장을 찍었던 것 같다. 심지어 홍대점 이달의 멤버로 뽑히기도.. 여러 곳의 위워크 지점을 가봤지만 홍대점이 제일 안락하고 집중도 잘 된다. 다음 여름에 또 가게 부디 망하지 말아주세요..
올해의 예능
쿠팡플레이의 대학전쟁. 졸업하고 십년만에 애교심이 샘솟았다.
올해의 보람
예전에는 내 용돈을 제하고 남은 금액을 몽땅 남편에게 보냈는데, 요즘은 내가 적금이든 뭐든 일정 금액을 모아서 남편에게 보낸다. 하반기에는 수입이 꽤 있어서 남편에게 이체하는 주기가 짧았다. 여보, 내가 열심히 번 돈이야. 주식엔 넣지마
올해의 깨달음
나는 요행수를 노리지 말고 일을 열심히 할 팔자다. 네..
올해의 기술
누끼따기
올해의 고통
11월 셋째주에 지독하게 걸린 감기. 열이 40.5도까지 오른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있어 노트북 앞에서 울면서 타이핑하던 내 모습이 액자처럼 뇌리에 남아있다. 병가도 반차도 없는 프리랜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감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 현타가 왔고, 이런 변수에 노련하게 대처하는 노하우를 고민하게 됐다.
올해의 도넛
크리스피크림 슈가코티드 도넛. 냉동실에 쟁여두고 아침에 해동해서 커피랑 먹으면 참 좋다.
올해의 동네
말해뭐해. 망원동. 정확히는 망원2동. 사랑하는 우리 동네. 내년이면 떠날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난다.
올해의 밥상
일이 아주 고단한 나머지 저녁 차릴 기력이 없는 날이면 저녁에 남편이랑 오토김밥을 종종 시켜먹었는데, 어떻게든 힘을 쥐어짜서 굳이 된장국을 끓여 곁들였던 어느 날의 밥상. 배달음식에 된장국 하나 곁들였을 뿐인데 몹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된장국을 한 모금 들이키고 낮은 탄성을 내뱉던 남편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올해의 과자
편의점 신상 과자 참 많이 사 먹어봤는데 결국 찾게되는 건 클래식. 새우깡, 스윙칩, 통크, 초코송이 사랑해요.
올해의 서류
어찌저찌 또 내게 된 내 인생 두 번째 사업자등록증.
올해의 호칭
에디터님, 매니저님, 작가님. 내 직업이 정의되어 있지 않은 탓일까. 뭐라고 불려도 상관없다. 돈 벌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