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를 처음 본 내 나이 열일곱. 그 뒤로 열일곱 해가 더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프렌즈를 본다.

1. 챈들러는 좋은 배우자다.
남편으로서의 챈들러는 자신의 단점에 솔직하고, 나아지려고 노력하며, 가정에 충실한다. 제일 높이 평가하는 덕목은 사랑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할 줄 안다는 것. 언변이 뛰어나다는 것과는 좀 다른 결인데 이것도 솔직함과 연결되는 것 같다. 그의 부드러운 솔직함은 상대에게 사랑받는다는 충만함을 느끼게 한다. 닮고 싶다!

2. 여섯을 둘셋씩 묶으면 나름의 다이내믹이 있다.
제일 재밌는 건 조이-챈들러-모니카의 관계. 조이의 룸메이자 사실상의 부양자였던 챈들러가 모니카와 결혼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흡사 부모 자식 관계로 확장된다. 교외로 이사 갈 집에 조이의 방을 마련해준다거나, 털사로 떠나는 챈들러가 모니카보다도 조이를 달래야한다거나 하는 것처럼.
다음으로 좋아하는 조합은 돈이 쪼들리던 시절의 피비-레이첼-조이, 과거에 삥 뜯고 뜯기던 피비-로스, 결코 선 넘을 일 없는 남사친 여사친의 정석과도 같은 챈들러-레이첼 조합.

3. 로스는 옷빨이 좋다.
종종 그의 패션이 nerdy함의 소재로 쓰이다 못해 가죽바지나 여성용 니트를 입는 에피소드도 있지만. 그만큼 로스에게 패션은 캐릭터를 묘사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는 뜻 아닐까. 특히 로스의 겨울옷들이 예쁜데, 톤다운된 니트나 셔츠, 어깨 각 잘 잡힌 코트나 코듀로이 소재의 재킷 따위가 탐난다. 구 여친 모나 집에 두고 와서 몰래 찾으러 가던 연어 색깔 셔츠도 솔직히 이쁘지 않나.

4. 레이첼 집안은 생각보다도 더 잘 사는 것 같다.
비단 경제력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에서 나오는 여유와 센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내공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라이프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pushover라고 놀림받지만 그건 경험치가 부족했던 시즌 초반이나 해당하는 이야기. 실제로 열 번의 시즌을 거치며 가장 성장한 캐릭터는 레이첼 아닌가.

5. 인생은.. 재니스처럼
프렌즈 등장인물 중 자존감 강한 캐릭터는 단연 재니스다. 우연 같은 운명처럼 등장할 때마다 그녀는 그 상황을 진심으로 반긴다. 여섯 명이 부담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실제로 재니스는 10개의 시즌 모두 얼굴을 비추는데, 챈들러는 말할 것도 없고 조이랑은 (우정)데이트도 하고, 심지어 로스랑은 썸도 탔다. 모니카의 결혼식에 초대되었(다고 생각하)고, 레이첼과는 산모 동기로 만난다. 이때 레이첼에게 건네는 충고를 보며 마냥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다. 어쩌면 남성 편력이 그녀의 생존 방식일지도. 흥미로운 건 피비랑은 딱히 접점이 없다는 것. 기존쎄가 기존쎄를 알아보고 서로 피한 게 아닐까.

6. 다들 얼마나 벌까?
특히 프리랜서로서 궁금한 건 마찬가지로 프리랜서인 피비의 수입이다. 뉴욕 시내에서 혼자 사는 아파트의 월세를 감당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벌어야 하는 것인가? 마사지 말고 투잡이 있는 것인가? 나만 궁금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구글링해 보니 피비는 7천만 원은 벌었을 거라고. (링크)

7. 특기는 사과
파국으로 치닫다가도 언제나 훈훈한 화해로 끝나는 비결은 진정 어린 사과다. 모니카가 약혼한 날 로스와 키스한 레이첼. 친구 일터에서 노래 부르다 쫓겨난 피비의 치졸한 복수. 레이첼을 좋아하게 됐다고 로스에게 털어놓는 조이도 그랬지. 질투나 짝사랑 같이 내가 초라해지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필살기.

8. 결국 가족
영원할 것 같던 여섯 명의 시간도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며 변화를 겪는다. 서운하지만, 당연한 삶의 진리.
얼마전 밤늦은 시간 동네 술집에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모여 있는 걸 보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도 저랬던 적이 있었다는게 꿈 같달까.. 그런 술자리가 가끔 그립기도 하지만 서른 다섯의 나는 남편이랑 둘이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무래도 더 좋다. 그래서 프렌즈의 엔딩이 더 와닿기도 하고.
텅 비어버린 모니카의 집을 보며 울컥하는 마음을 달래려면 바로 이어서 시즌 1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틀면 된다. 나의 인생은 시즌 1으로 돌아갈 수 없어도 말이다. 그렇게 나는 프렌즈를 네버엔딩 정주행하며 대리만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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