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측근과 통화를 했다. 그간의 근황을 털어놓으며 늘 그랬듯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고민해서 뭐하냐는 결론으로 수다를 마무리했다. 대화를 곱씹으며 누워있자니 문득 그래비티가 생각났다. 머리 속이 복잡할땐 거대한 우주의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 대신 찾아본 2013년의 메모.
—
흥미로운 리뷰 두 편을 읽었다. 먼저 내 머리속에 둥둥 떠다니던 의문점을 깔끔하게 정리해 날 놀라게 한 신형철은 '생명을 그 자체로 긍정'하라는게 이 영화의 메시지라고 해석한다. 산드라 블록이 우주복을 벗고 산소를 호흡하는 장면을 '자궁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형상'으로까지 묘사하면서. ‘이 영화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잠재적 허무주의자들에게 생명은 그 자체로 긍정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스페이스 시뮬레이션이다.’
한편 소설가 김영하님은 에피쿠로스의 말을 인용하며 그녀가 우주에서 진짜 죽음과 대면하면서 삶에 대한 갈망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라고 말한다. 방금 전까지 저쪽에서 춤을 추던 하버드 졸업생과 우주파편에 얼굴을 관통당한 동료의 시체는 에피쿠로스의 논리에 따르면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거니까.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뒤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영화 속 메시지에 대한 문제 의식은 비슷했어도 해석의 키워드가 전혀 다른 이 두 리뷰의 메시지는, 결국 극한의 상황을 체험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의 유한한 삶을 긍정하라는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는거다. 하지만 이 아저씨들도 알거야.. 극한의 상황을 체험하기 전까지 이 말들도 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