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김포공항의 엔제리너스에서, 종달리의 돌담집에서, 서귀포의 카페에서, 세화해변의 카페에서 읽었다. 각 장소의 배경이 되는 소리도 제각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서귀포 핫플레이스에서 들려온 라운지음악이 기억에 남는다. 청명한 하늘과 고요한 바다와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았기에 나는 그 소음을 의식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소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백 몇십쪽에 달하는 이 책은 내지가 무척 얇았다. 출판사로서는 필연적인 선택이었겠지만 독자에게도 손가락에 착 감기는 얇은 종이는 부담없이 다음 장을 넘기기에 딱 좋은 두께였다. 두 장을 한꺼번에 넘긴 적도 물론 없었다. 책장을 넘기는걸 의식할 틈 없이 물흐르듯 이야기가 읽힌건 종이가 적당히 얇은 것도 한 몫했다.
일행이 잠시 외출한 사이 숙소 마당 벤치에서 책을 읽었다. 햇빛이 좋았고, 마침 내용도 따스했다. 자외선이 심하다 싶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책을 폈을 때는 페이지가 어둡게 보였다. 그 채광 좋은 방 안에서 나는 글씨가 보이지 않아 눈을 한참동안 껌뻑거렸다.
누군가가 읽던 책을 꺼냈는데 그 사이 끼어있었던 연필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오늘 숙소 근처의 편집샵에 들렀을 때 그 생각이 나서 두 자루의 연필을 샀다. 감정이 태동하는 순간을 건드리는 작가의 강렬한 문장들을 연필로 표시해둠으로써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이 책에 흔한 밑줄 하나 그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소녀의 일생이 이리도 강렬한데 그깟 밑줄이, 한낱 나의 감상이 무얼 요약할 수 있나 싶어서 그랬다.
그러한 연유로 일단은 이 책을 읽던 순간의 곁가지 감각들을 기록해둔다. 그럼 나중에 꺼내보기가 조금이나마 쉬워질 것 같아서. 게으른 주제에 변명은 참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