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베이킹 스튜디오에 가서 발효빵 만드는걸 배웠다. 나 말고 다른 수강생으로 어떤 여성분이 계셨는데 조잘조잘 수다 떨기 좋아하는 선생님의 노력이 무색하게 시종일관 뚱하게 앉아있던 그녀는 진정 말이 없었다. 다섯시간에 가까운 수업시간 동안 나는 그녀로부터 '아니요' 라는 딱 세 음절만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화는 나와 선생님 둘이 나누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스튜디오의 공기를 지배하는 것은 그녀였다. 직접 만든 빵을 한아름 들고 집에 오는 길에도 그녀의 불편했던 존재감이 자꾸만 떠올랐다.
밤에는 이역만리 청량리 땅까지 가서 친구의 단편 영화를 보고 왔다. 햇수로 12년지기 친구인 이 아이는 학창시절부터 말이 정말 많았다. 내가 오죽했으면 30분간 아무말도 안하면 돈을 주겠다 했고, 그 아이는 30분간 가까스로 침묵을 지켜 내기에서 이겼던 일화도 있다. 말이 정말 많은데 정작 그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 안나는건 개인적으로 늘 미안하다. 예쁜 여자 앞에서는 말 수가 적어진다는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 답게 20분 남짓한 상영 시간 동안 대사가 정말 많았다. 외국어 대사도 말이 하도 많아서 자막의 길이가 스크린 가로길이 뺨쳤다. 등장인물들도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웃긴 대사가 몇 개 있었는데 역시나 기억이 안나서 또 미안하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서는 라스를 보며 카톡으로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요새 야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친구는 갑자기 방언이 터지며 회사 욕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쭈꾸미나 먹으러 가자며 계속해서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열 받는 일을 내 편에게 말로 전하다보면 실제보다 약간의 과장이 더해지거나 나에게 좀더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럼 더 열받게 되지 않나? 그 열받았던 일을 굳이 상기시키지 않게끔 돕는 것이 친구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음 어쩌면 그냥 내가 그의 말을 듣기 싫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순간 필요한 말만 하는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여러번 느낀 하루였다. 축의금 봉투 사건으로 대차게 까인 라스의 막내 엠씨도 비슷한걸 느낀 모양이다. 말이 없네